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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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6세(1895-1952)는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의 국왕이었다. 본명은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이며, 형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즉위했다. 즉위 전 요크 공작으로 활동하며 노동자 복지에 힘썼고, 언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런던에 머물며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했으며, 윈스턴 처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제국의 해체가 가속화되었지만, 그는 왕실의 인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조지 6세는 1952년 사망했으며, 그의 딸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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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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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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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지 6세 |
본명 |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 (Albert Frederick Arthur George) |
출생일 | 1895년 12월 14일 |
출생지 | 영국 노퍽주 샌드링엄, 요크 코티지 |
사망일 | 1952년 2월 6일 |
사망지 | 영국 노퍽주 샌드링엄 하우스 |
매장일 | 1952년 2월 15일, 1969년 3월 26일 (개장) |
매장지 | 윈저성 세인트 조지 교회 왕실 지하 납골당, 조지 6세 기념 교회당 |
종교 | 영국 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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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국왕 즉위 | 1936년 12월 11일 |
대관식 | 1937년 5월 12일 |
영국 국왕 재위 |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
인도 황제 재위 |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8월 15일 |
이전 국왕 | 에드워드 8세 |
다음 국왕 | 엘리자베스 2세 |
인도 황제 직위 | 폐지됨 |
영국 연방 수장 | 1949년 4월 ~ 1952년 사망 |
가족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1923년 4월 26일 결혼) |
자녀 | 엘리자베스 2세 마거릿 공주, 스노든 백작부인 |
아버지 | 조지 5세 |
어머니 | 메리 오브 테크 |
군사 경력 | |
소속 | 영국 해군 영국 공군 |
복무 기간 | 1913년–1919년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유틀란트 해전 |
교육 | |
교육 기관 | 왕립 해군 사관학교, 오스본 브리타니아 왕립 해군 대학 |
음성 정보 |
2. 생애
앨버트는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인 1895년 12월 14일, 노퍽 주 샌드링엄 농장에 있는 요크 코티지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요크 공작 조지 왕자(후일 조지 5세)였고, 어머니는 요크 공작 부인(후일 메리 여왕)이었다.[4] 그의 생일은 고조부 알버트 공의 서거 34주년이었다.[5]
앨버트는 1896년 2월 17일 샌드링엄 세인트 메리 마들렌 교회에서 "앨버트 프레드릭 아서 조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8] 왕실 내부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버티"로 알려졌다.[9] 앨버트는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 형 에드워드에 이어 왕위 계승 순위 4위였다.
앨버트는 자주 아팠고 "쉽게 놀라고 다소 눈물이 많은" 아이로 묘사되었다.[11] 그는 수년 동안 말더듬을 겪었고, 천성적으로 왼손잡이였지만, 당시 일반적인 관행대로 오른손으로 글을 쓰도록 강요받았다.[12] 만성적인 위장 문제와 함께 오다리가 있어 고통스러운 교정 부목을 착용해야 했다.[13]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웨일즈 공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했다. 앨버트 왕자는 아버지와 형에 이어 왕위 계승 순위 3위로 올라섰다.
1909년부터 앨버트는 오스본 왕립 해군 대학에서 해군 사관생도로 다녔다. 1911년 최종 시험에서 꼴찌를 했지만, 다트머스 왕립 해군 대학으로 진학했다.[14]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서거하자 아버지는 조지 5세가 되었고, 앨버트는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15]
앨버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3주 후 애버딘으로 후송되어 존 머녹 경에게 맹장 수술을 받았다.[18] 주트란트 해전(1916년 5월 31일~6월 1일)에서 ''콜링우드'' 함의 포탑 장교로 참전하여 전공 표창을 받았으나, 1917년 11월 십이지장궤양 수술로 인한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19]
1918년 2월 앨버트는 크랜웰의 왕립 해군 항공대 훈련 시설에서 소년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왕립 공군이 설립되면서 왕립 해군에서 왕립 공군으로 전속되었고,[20] 영국 왕족으로는 처음으로 정식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24]
1919년 10월 앨버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년 동안 역사, 경제, 시민학을 공부했고,[29] 1920년 6월 4일 아버지는 그를 요크 공작, 인버네스 백작, 킬러니 남작으로 서임했다.[31] 그는 아버지를 대표하여 탄광, 공장, 철도역을 시찰하며 "산업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32]
당시 왕족은 다른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관례와 달리, 앨버트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1920년, 그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온을 만났는데, 그녀는 스트래스무어와 킹혼 제14대 백작과 백작부인의 막내딸이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36] 엘리자베스는 1921년과 1922년 두 차례 그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오랜 구애 끝에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38] 앨버트와 엘리자베스는 1923년 4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는데, 왕족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은 현대적인 행보로 여겨졌다.[39]
앨버트는 말더듬 때문에 공개 연설을 두려워했다.[42] 1925년 10월 31일 웸블리에서 열린 영국 제국 박람회 폐회사는 그에게 고역이었지만,[43] 이후 호주 출신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 호흡 운동을 연습하며 치료를 받았다. 공작 부인도 그를 도왔고,[44] 그 결과 더듬거림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45]
공작 부부에게는 1926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가족들에게는 "릴리벳"으로 불림)와 1930년에 태어난 마가렛 두 자녀가 있었다.
2. 1. 즉위 이전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인 1895년 12월 14일, 요크 공작 조지(훗날의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기일에 태어나 앨버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여러 지병을 앓았는데, 특히 어렸을 적 유모의 방치로 위염 때문에 자주 고생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 조지 5세는 엄격한 해군식 교육을 자녀들에게 적용하였는데, 앨버트의 남동생 헨리 왕자는 아버지가 쳐다보기만 해도 기절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앨버트는 병약했고, "쉽게 겁을 먹으며 잘 울었다"라고 묘사되었다. 안짱다리를 고정하기 위해 부목을 착용했으며,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였으나 강제로 오른손잡이로 교정받았다.[11][12][13][138][140]1909년부터 오스본에 있는 왕립해군사관학교에 사관 생도로 재학했다. 재학 시절 다른 생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1911년에 치른 최종시험에서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다트머스 왕립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14]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서거하자 아버지 웨일스 공 조지는 조지 5세로 왕위를 계승하였고, 앨버트는 형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순위에 올랐다.[15]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앨버트는 1916년 윌란 해전(1916년 5월 31일 – 6월 1일)에서 포탑 장교로서 공을 인정받았다.
1919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하여 1년간 역사, 경제학, 시정학을 공부하였다.[29] 1920년 6월 4일, 요크 공작, 인버네스 백작, 킬라니 남작 칭호를 받았다.[31]
요크 공작 지위에 오른 그는 공적인 일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를 대표하여 탄광, 철도, 공장을 방문했으며, 노동자층과 유대를 형성하는 역할이었다. 주된 활동은 비공식적인 기구인 산업복지회 회장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공장의 여러 후생조건에 관해 자신이 제일 먼저 알기를 바란다는 명령을 내려 노동자 복지 개선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래서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32] 그는 자주 공장을 돌아보았는데, 번거로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 방문할 때마다 깔리던 자주빛 카펫은 생략했었다. 형 에드워드 8세의 유부녀와 스캔들 등 미덥지 못한 행동으로 앨버트의 부담은 더 가중되었다.
앨버트는 내성적인 성격과 말더듬증 등으로 형 에드워드 8세에 비해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사냥, 낚시, 테니스를 즐기는 등 신체적으로 활동적이었다. 춤을 매우 잘 추었고, 옷 또한 잘 입었다.[33]
영국 왕실의 결혼은 국내외적으로 항상 화제가 되었는데, 앨버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앨버트의 청혼을 받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지나치게 경직되고 도덕적인 분위기로 잘 알려진 조지 5세의 왕실이 자유분방한 생활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왕족 출신이 아닌 자신의 지위로 그의 청혼을 두 번 거절하였으나, 앨버트는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성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하였다. 앨버트의 어머니 테크의 메리 왕비 또한 글래미스 성으로 엘리자베스를 방문한 후 "버티(요크 공)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녀"라며 엘리자베스를 설득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세실리아 보우스 라이언과 테크의 메리 왕비의 설득으로, 엘리자베스는 앨버트의 세 번째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국 앨버트는 영국 왕립 해군 소령 예편 직후 스코틀랜드 귀족가문의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1923년 4월 26일 결혼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신선함과 우아함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결혼 전부터 애민(愛民) 정치가로 존경받던 앨버트도 국민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조지 5세는 공작 부부 동반으로 해외 여행을 자주 시켰으며, 앨버트의 말더듬증을 고치도록 오스트레일리아인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어장애 치료에 큰 효과가 없자, 조지 5세는 윈저성 내의 왕실 별장을 앨버트에게 내어주고 자주 요양하면서 병을 치료하도록 배려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묘사되어 있다.
1926년 두 사람은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고, 4년 후에는 둘째 딸인 마거릿 로즈 공주를 낳았다. 아버지 조지 5세와 달리 매우 가정적이었던 앨버트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로즈 공주를 일컬으며 "릴리벳은 나의 자랑이요,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Lilibet is my pride, Margaret is my joy)"라고 기자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2. 2. 재위 기간
1936년 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평소 형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던 그는,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직전까지 만찬회 등에서 왕을 옹호하곤 했다. 1936년 12월 3일, 에드워드 8세는 그의 어머니인 테크의 메리의 거처 말보로 하우스에서 테크의 메리와 조지 6세(당시 요크 공)에게 양위 결정을 알렸다. 에드워드 8세의 하야 소식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어, 그는 평소 냉정하기로 유명했던 어머니 테크의 메리의 품에 안겨 1시간 넘게 울었다고 전해진다.[53] 알버트는 에드워드 8세가 일으킨 심프슨 부인과의 스캔들로부터 영국 왕실을 회복시키고, 화목한 가정과 안정성의 아버지 조지 5세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조지 6세'를 왕명으로 결정하며 지속성을 표방하였다.[57] 에드워드 8세의 퇴위는 전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로서의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던 조지 6세는 3주간의 간단한 준비 후에 공식적인 행사에 들어가야만 했다.건강하고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형이 있었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갑작스런 형의 퇴위와 함께 자신이 왕이 되자 모든 것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한 가지씩 시험 대상에 올려놓고 얼마간 지켜본 후 결정을 내리는 신중함을 보이곤 하였다.
당시 유럽에는 전체주의 세력 파시즘과 나치즘이 팽배해 있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자칫 전쟁의 조짐마저 보이자 그는 평화를 대내외 정치의 우선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화 정책과 평화를 내세우는 네빌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자 조지 6세는 그를 일단 지지하였다.
체임벌린의 노력으로 외교적으로 평화적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독일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여기서 조지 6세는 평화보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고통 속으로 국민들을 다시 몰아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끝없는 탐욕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1939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미국 간 공조 방안을 마련하고 돌아온 조지 6세는 곧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날 밤 방송을 통해 조지 6세는 영국 및 영국 연방 전역에 전쟁 선포를 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공습 때문에 어느 전쟁 때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한 조지 6세는 1940년 9월 공습 때 포격으로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인데도 조지 6세는 인근 이스트엔드 지역의 상처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곤 하였다. 조지 6세가 민중들과 함께 한 시간은 동생인 켄트 공작 조지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부왕이 행했던 것처럼 1943년부터 군사단과 병기 제조 공장 등을 수시로 시찰하였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0일 전에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출정을 기다리는 영국군과 함께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5월 8일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해진 국내 경제를 풀어야 될 총선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사회보장제도를 들고 나온 영국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전쟁 승리로 이끈 영국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을 물리치고 수상이 되었다. 조지 6세는 애틀리에게도 역시 처음부터 관심을 주지 않고 그의 정책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애틀리와의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특히 사회주의자인 애틀리의 국유화를 향한 급진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조지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대영제국의 분해를 지켜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애틀리의 내각에서 특히 제국으로부터 자발적인 연합체인 영국 연방으로의 탈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각각 독립된 점령지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되자, 조지 6세는 인도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였고,[95] 대신 각각 인도의 왕과 파키스탄의 왕이 되었다. 인도가 영국 연방 내에서 공화국 체제로 전환하자 조지 6세는 인도의 왕의 호칭을 잃었고, 그의 죽음까지 파키스탄의 왕의 칭호를 유지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조지 6세는 인도의 왕에서 영국 연방의 수장이 되었다.
2. 3. 말년
조지 6세는 선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지병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 등 인종 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지역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백인과의 악수만 허용한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흑인들의 접근을 막는 경호원들을 게슈타포라고 부르기도 했다.[104][105] 그러나 1948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문을 앞두고 동맥경화증 증세를 보여 일정이 취소되었고,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106]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조지 6세의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다.[107] 심한 흡연[108]으로 인해 폐암, 동맥경화증, 뷰르거병과 같은 질병이 악화되었다. 1949년 3월, 오른쪽 다리 동맥 폐쇄로 다리 절단 위기에 처하자, 오른쪽 요추 교감신경절제술을 받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순방을 연기했다.[109] 건강 악화로 장녀이자 왕위 계승자인 엘리자베스가 왕실 업무를 더 많이 맡게 되었다. 연기되었던 순방은 엘리자베스 공주와 남편 필립 공이 국왕 부부를 대신하여 다녀오는 것으로 재조정되었다.
1951년 5월 영국 축제 개막식에 참석할 정도로 회복되었으나, 6월 4일, 노르웨이 하콘 7세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4주간의 완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발표가 있었다.[110] 9월 23일에는 악성 종양으로 클레멘트 프라이스 토머스에게 왼쪽 폐 절제 수술을 받았다.[111] 10월,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캐나다 순방을 떠났는데, 조지 6세의 병세로 일주일 연기되었다. 11월 국회 개회식에서는 대법관인 시몬즈 경이 국왕의 옥좌 연설을 대신 읽었다.[112] 성탄 방송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녹음한 후 편집되었다.[113]
1952년 1월 31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는 케냐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엘리자베스와 필립을 배웅하기 위해 런던 공항(1966년 히드로 공항으로 개명[114])으로 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2월 6일 오전 7시 30분 그리니치 표준시에 노퍽주 샌드링엄 하우스 침실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115][116] 그의 딸은 케냐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되었다.[117]
2월 9일부터 조지 6세의 관은 샌드링엄의 세인트 메리 마들렌 교회에 안치되었다가 2월 11일부터 웨스트민스터 홀에 국민 조문되었다.[118] 장례식은 2월 15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119] 그는 처음에 왕가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69년 3월 26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내부의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으로 옮겨졌다.[120] 2002년, 그의 사망 50주년에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마거릿 공주의 유골이 함께 안치되었다.[121] 2022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유골도 예배당에 안치되었다.[122]
3. 유산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퇴위에 대해, 노동당 스코틀랜드 출신 하원의원 조지 하디(George Hardie)는 "공화주의에 큰 도움을 준 사건으로, 50년간 홍보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229] 조지 6세는 형 에드워드에게, 국왕 퇴위의 영향으로 "영국 왕좌가 흔들리고 있다"며, 본의 아니게 왕좌를 "원래대로 굳건히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편지를 썼다.[230]
조지 6세는 영국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매우 낮을 때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국민들은 전쟁의 고통을 견뎌야 했고, 대영제국의 위상은 쇠퇴해갔다. 그러나 조지 6세는 성실한 가장이자 책임감 강한 국왕으로, 개인적인 용기를 보임으로써 영국 국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231][232]
조지 크로스와 조지 메달(en:George Medal)은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중 조지 6세가 고안하여 일반 시민의 용감한 행위를 기리는 훈장이다.[233] 1943년에는 몰타 전 지역에 조지 크로스를 수여했다.[234] 1960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윈스턴 처칠과 함께 조지 6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en:Ordre de la Libération)이 추서되었다.[235]
조지 6세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도로 등은 많다. 런던의 킹 조지 병원(en:King George Hospital, London), 서리의 킹 조지 6세 고속도로(en:King George VI Highway), 킹 조지 역(en:King George Station), 남극 대륙의 조지 6세 해협(en:George VI Sound), 경마의 G1 경주인 킹 조지 6세 앤드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와 킹 조지 6세 체이스 등이 유명하다.
4. 왕실
왕족은 다른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당시 관례와 달리, 앨버트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1920년 4월 요크 공작 작위를 약속받은 앨버트는 레이디 러프버러와의 관계를 정리했다.[35] 같은 해, 그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온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다.[36] 엘리자베스는 왕족이 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1921년과 1922년 두 차례 그의 청혼을 거절했지만,[37] 오랜 구애 끝에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38]
앨버트와 엘리자베스는 1923년 4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다. 왕족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은 현대적인 행보로 여겨졌다.[39] 영국방송협회는 이 행사를 라디오로 방송하고자 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 수도원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0]
1924년 12월부터 1925년 4월까지 요크 공작 부부는 케냐, 우간다, 수단을 수에즈 운하와 아덴을 경유하여 순방했다.[41]
앨버트는 말더듬이 때문에 공개 연설을 두려워했지만,[42] 호주 출신의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 호흡 운동을 연습하면서 더듬거림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44][45] 1927년, 앨버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의회 의사당을 개관했다.[46]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로 가는 해상 여정 중 자메이카에서 앨버트는 흑인 버트랜드 클락과 복식 테니스를 쳤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고 현지에서는 인종 간 평등을 보여주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47]
요크 공작 부부에게는 엘리자베스(가족들에게는 "릴리벳"으로 불림)와 마가렛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48] 이들은 화이트 롯지, 리치먼드 공원과 피카딜리 145번지에서 살았다.[49] 1931년, 앨버트는 캐나다 총독으로 고려되었지만, 독립국무장관 J. H. 토마스의 조언에 따라 조지 5세가 이를 거부했다.[50]
4. 1. 배우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1900년 8월 4일에 태어나 2002년 3월 30일에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23년 4월 26일에 조지 6세와 결혼했으며, 역대 최장수 왕비였다.[39]왕비 | 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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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lizabeth Bowes-Lyon영어 The Queen Mother영어 | 1900년 8월 4일 | 2002년 3월 30일(101세) |
당시 왕족은 다른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관례가 있었으나, 앨버트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1920년,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온을 만난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36] 엘리자베스는 1921년과 1922년에 두 차례 청혼을 거절했지만,[37] 오랜 구애 끝에 청혼을 받아들였다.[38] 1923년 4월 26일, 앨버트와 엘리자베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으로, 현대적인 행보로 평가받았다.[39]
4. 2. 자녀
앤 공주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스노든 백작 부인
(71세)
(1978년 7월 11일 이혼)
(초대 스노든 백작)
(제2대 스노든 백작)
레이디 사라 채토